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장애 관련 논픽션 리뷰

by 잠온 2024. 10. 19.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책 표지

 

소개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는 일본의 논픽션 작가인 '가와우치 아리오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이 작품은 저자인 아리오 씨가 선천적 전맹인 시라토리 씨와 일본 내 다양한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시를 관람한 기록을 엮은 이야기입니다. 전시 관람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관념을 깨부수고 맹인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함께 전시를 즐기는 모습이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저자는 시라토리  씨에게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전시물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각각의 전시물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견문을 넓히는 경험을 합니다.

 

리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데 예술 작품을 보러 간다는 제목이 의아했고 예술 관람을 보다 재밌게 할 방법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원래도 눈썰미가 좋은 편은 아닐 뿐더러 중학교 때 눈 건강에 이상이 발견된 후 안경으로도 시력 교정에 한계가 생겨 디테일한 요소들까지 파악해야 하는 예술은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흥미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이 시각적인 요소에 자신이 없다 보니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마냥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제목이 흥미롭긴 하지만 이것도 그냥 장애인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루는 글일 뿐이겠지'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책은 시라토리 씨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 변화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저자가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에게 제대로 작품을 묘사해야 한다는, 그를 배려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온 신경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챕터가 넘어갈수록 시라토리 씨를 배려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편하게 그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책의 막바지에 다다라서도 저자는 전화를 걸어오곤 하는 시라토리 씨의 모습에 전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대답에 놀라는 장면처럼 시라토리 씨에 대해 오해와 정정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점이 존재하며 대화를 통해 이를 정정하면서 보다 가까워지는 관계, 이 모습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친밀함이 포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음으로 시라토리 씨를 일방적으로 배려하는 전시 관람이 아니라 시라토리 씨와 저자가 서로 도움이 되는  관람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시라토리 씨와 함께 작품을 관람한 사람들은 작품을 보다 자세히 관찰하게 됐고, 서로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를 나누면서 작품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라 서로 상부상조하는 형태의 관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관람 방식은 이미 미국에서 '대화형 미술 감상법'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으며 여러 나라의 교육에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나는 어째서 시라토리 씨와 함께 계속 작품을 보았을까?

  처음에는 작품의 구석구석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내 눈의 ‘해상도’가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와 내가 ‘서로가 서로를 위한 보조장치가 된 것 같아서 재미있다.’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없는 기회이니 함께 더 작품을 보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많은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시라토리 씨의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평소에는 안 보이는 것,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많은 것을 발견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시라토리 씨가 사람들과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어렴풋이 이해되었습니다. E-book 리더기로 책을 읽다 보니 책에 삽입된 작품들이 모두 작은 흑백 이미지들로 보였습니다. 이미지 크기도 작은데 흑백이다 보니 작품을 시각적으로 살펴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라토리 씨와 함께 관람하는 사람들의 작품 묘사를 자세히 읽는 것으로 작품을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그림을 묘사한 초반의 챕터에서는 상상도 잘되지 않고 지겹게 느껴졌지만, 세번째 챕터에서 크리스티앙 볼랑스키의 회고전을 묘사하는 순간 그 챕터에 푹 빠져서 챕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챕터를 다 읽은 후에는 마치 제가 그 전시회를 다녀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면서 저자와 시라토리 씨처럼 전시회를 관람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